누가복음 8:49-56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1. 이성이 멈추는 자리.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8:41-42에 따르면, 그에게는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었고, 그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 자체가, 그 절박함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시는 도중,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매 순간이 급박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49절, 가장 두려운 소식이 도착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49절). 이 문장에는 이성적 판단의 최종 결론이 담겨 있습니다.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선생님을 번거롭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관점에서 이 판단은 틀리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판단과 믿음은 같은 선택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죽음과 같은 극단적 상황 앞에서, 이성은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끝났다.'
잠언의 기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권면을 합니다.
잠언 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이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이 내린 결론이 최종 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에게 전해진 소식은 사실이었습니다. 딸은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상황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같은 원리가 나옵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야이로가 서 있던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성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2. 두려움 없는 믿음.
예수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50절).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두려워하지 말라'이고, 둘째는 '믿기만 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으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것을 넘어 두려움 없는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두려움이 섞여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두려움 위에 믿음을 놓으라고 하십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자리에 선 적이 있습니다.
시편 56:3-4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는 고백은 솔직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요구하신 믿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 41:10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의 근거는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분의 존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15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가 보호자를 신뢰하는 것은 맹목이 아닙니다. 아이는 보호자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관계적 확신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신뢰라는 것은 근거가 없을수록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모든 상황이 좋을 때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딸이 죽었다는 소식 앞에서도 믿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기만 하라'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표현은, 믿음이 눈에 보이는 근거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야이로가 가진 눈에 보이는 근거는 '딸이 죽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너머를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이르셨을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그 아이의 부모 외에는 아무도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51절). 52-5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절)고 하시자 그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었습니다.
비웃은 사람들의 반응도 이성적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두고 '잔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꼐서는 이들을 밖에 두시고, 믿음의 자리를 구별하셨습니다. 함께 들어간 사람들, 곧 제자 셋과 부모는 비웃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신앙의 시선과 믿음의 자리가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도 비슷한 자리에 선 적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믿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17,19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도 이성적 판단은 '아들이 죽으면 끝'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이로에게 요구된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3. 믿음이 지키는 자리.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말씀하십니다. " 아이야 일어나라"(54절). 그리고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납니다(55절).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행동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죽은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고, 이름 부르듯 불러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 환상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에스겔 37:5-6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죽은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예수님, 이 두 장면은 같은 권능을 보여줍니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권능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 5:21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살아난 뒤 "먹을 것을 주라"(55절)고 명하십니다. 이 세부적인 지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살아난 아이에게 실제적인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기적 자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적 이후의 일상까지 돌보십니다. 열왕기하에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을 때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4:36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신 뒤에 그 아이를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리시고, 먹이시고, 부모에게 돌려주십니다.
56절에서 부모는 놀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서 반복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이를 '메시아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기적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돌아오는 것은 결국 야이로가 서 있던 그 자리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리, 이성이 '끝났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이 우리의 내면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말합니다.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약속은, 믿음이 단지 외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지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 이전에, 야이로가 두려움 앞에서 믿음을 선택한 그 순간이 이미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생각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고, 행동을 지키는 것, 이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결단입니다.
묵상을 마치며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성은 끝났다고 말했고, 주변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아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는 자리에서,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생각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고, 행동을 지킵니다.
이성이 멈추는 자리에서, 믿음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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