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QT

스스로 멸하는 악, 돌아가 전하는 은혜

김익제 2026. 3. 1. 02:42

누가복음 8:31-39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1. 악은 스스로 멸하는 미련한 존재입니다.

본문에서 귀신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첫째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명하지 말아달라는 것(31절), 둘째는 돼지 떼에 들여보내 달라는 것(32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돼지에 들어갔고, 그 결과 돼지 떼는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했습니다(33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악의 본질적인 미련함입니다. 귀신들은 무저갱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대안을 구했지만, 그 선택의 결과도 멸망이었습니다. 악은 자기 보존조차 지혜롭게 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로마서 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악에 대한 무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악에 능숙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의 귀신들은 악에 능숙한 존재였지만, 그 능숙함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잠언은 이 원리를 반복하여 경고합니다.

잠언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길이 결국 사멸로 끝나는 것, 이것이 악의 속성입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를 선택한 것도 그들 나름의 계산이었겠지만, 그 계산의 끝은 호수 속 멸망이었습니다.

잠언 1: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하리라'—악은 결국 자기를 멸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본문의 귀신들이 그 실례입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악은 예수님 앞에서 무력합니다.

본문에서 귀신들은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31-32절). '간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παρακαλέω(파라칼레오)는 '요청하다, 부탁하다'라는 뜻입니다.

 

악의 세력이 예수님께 허락을 구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권위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돼지에게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 점을 짧지만 강하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떱니다.'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다르지만, 귀신들조차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떨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골로새서는 이 권위의 근거를 십자가에서 찾습니다.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미 이기셨습니다. 본문에서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서 간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승리의 전조였습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 앞에서 두려워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이것이 악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하는 궁극적 이유입니다. 악은 미련하고, 예수님 앞에서 무력하며, 우리 안에는 그보다 크신 분이 계십니다.

 

3. 은혜보다 두려움을 선택한 사람들.

본문의 전개에서 가장 의외인 부분은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35절을 보면, 사람들이 나와서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37절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시기'를 구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분명히 놀라운 일을 목격했습니다.

 

오랫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온전해진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감사나 경배가 아니라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예수님을 보내달라는 요청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손실(돼지 떼의 죽음)에 대한 불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권능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에 대한 저항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은혜를 눈앞에서 보고도 그 은혜의 근원을 밀어냈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경고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잠언 1:29-30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지혜 앞에서 돌아서는 것, 은혜 앞에서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것—이것 역시 하나의 미련함입니다. 악만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보고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 역시 미련한 일입니다. 이사야는 이 패턴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선과 악의 전도, 광명과 흑암의 뒤바뀜—거라사 사람들은 눈앞의 광명을 보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히 임했는데도, 그것이 가져올 변화가 두려워서 외면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4. 돌아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말하라.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내달라 할 때, 귀신에서 풀려난 사람은 정반대의 요청을 합니다. 38절, '함께 있기를 구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 반응이 이렇게 갈린 것입니다. 한쪽은 떠나시기를 구했고, 한쪽은 함께 있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응답은 의외입니다.

누가복음 8: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은혜를 받은 자리가 곧 증인의 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가진 것은 신학 교육도, 제자 훈련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큰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세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네게 행하신 일을 말하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이'와 '예수께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체험을 통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십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 전파자가 되는 것이 세상의 눈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러합니다.

 

5. 선을 택하는 삶, 성령 안에서.

본문 전체를 돌아보면, 악과 선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귀신들은 스스로 멸망을 택했고, 거라사 사람들은 은혜 앞에서 두려움을 택했으며, 고침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택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선택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이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선을 택하는 삶의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미련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라'—본문에서 귀신 들렸던 사람의 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앞선 본문(27절)에 따르면 옷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않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35절).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단지 풀려남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선을 택하는 삶은 악을 피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전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이 고침받은 거라사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묵상을 마치며

악은 생각보다 미련합니다.

 

스스로 멸하는 길을 택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악은 예수님 앞에서 무력합니다. 허락 없이는 돼지에게조차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묻는 더 깊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거라사 사람들처럼 두려워하며 물러서고 있는가, 고침받은 사람처럼 그분과 함께하기를 구하고 있는가.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돌아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말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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