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26-30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1. 건너편으로 가신 예수님
누가복음 8:26은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한 문장이 갖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거라사(혹은 게르게사, 가다라) 지방은 갈릴리 호수 동편, 데가볼리 지역에 속한 이방인의 땅입니다. 유대인이라면 굳이 갈 이유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고,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부정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 절인 22절을 보면, 이 여정은 예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눅 8:22).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너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셨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뒤에 도착한 곳이 바로 이 거라사 지역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보는 누가복음 전체에서 반복되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피하는 곳으로,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십니다.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눅 19:5), 사마리아를 통과하셨으며(요 4:4),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눅 5:13). 예수님은 이 원리를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찾아'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 가신 것입니다. 거라사의 그 사람은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8절을 보면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호수를 건너, 풍랑을 뚫고, 그에게로 가셨습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4:11-12
"주 여호와꼐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흐리고 캄캄한 날에' '흩어진 모든 곳에서' 건져내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거라사의 무덤 사이는 문자 그대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건너편으로 가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찾아야 할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쇠사슬도 매지 못한 것
27절은 이 사람의 상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세 가지가 빼앗겨 있습니다.
옷(존엄), 집(공동체), 그리고 삶의 자리(무덤은 산 자의 공간이 아닙니다)입니다.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이 모두 무너진 상태입니다.
29절은 이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전합니다.
"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주변 사람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은 당시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쇠사슬이라는 물리적 힘으로는 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힘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무력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말하는 '곤고함'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답을 제시합니다.
로마서 7:25a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에베소서는 이 상태를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려내셨도다"
' 죽었던 너희를'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거라사 사람이 자기 힘으로 쇠사슬을 끊을 수는 있었지만, 자기 안의 귀신을 쫓아낼 수는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쇠사슬을 끊는 힘이 있어도,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시편 107:13-14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쇠사슬로 매는 것이 아니라, 결박을 푸시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쇠사슬이 아니라, 쇠사슬이 전혀 필요 없게 만드시는 분이었습니다.
3. 이름을 물으신 이유
28절에서 이 사람(혹은 그 안의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부르짖으며 엎드립니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주목할 점은, 귀신이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에 대한 매우 정확한 고백입니다. 야고보서에도 이 사실이 확인됩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의 말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30절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물으시는 장면은, 단순한 정보 확인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창세기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야곱(발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신 뒤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창 32:28).
이름을 묻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직면하게 하시는 동시에, 변화의 시작점이 되는 행위입니다.
거라사 사람의 대답은 "군대"(레기온, λεγιών)였습니다.
로마 군대의 한 군단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약 6,000명의 병사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 대신 귀신의 이름으로 대답합니다. 자기 정체성이 완전히 가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도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장면 이후(본문 범위 밖이지만) 귀신을 내쫓으시고, 이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눅 8:35) 예수님 발 아래 앉게 됩니다.
옷이 회복되고, 정신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27절에서 빼앗겨 있던 것들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이름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군대라는 귀신의 이름 뒤에 가려진, 그 사람 본래의 이름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귀신에게 하신 심문이 아니라, 한 사람을 되찾으시기 위한 첫 마디였습니다.
요한복음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목자이십니다. 수천의 군대 귀신 앞에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그 한 사람을 향해 있었습니다.
묵상을 마치며
누가복음 8:26-30은 다섯 절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 복음의 핵심적인 구조가 담겨 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찾아가시는 예수님,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상태,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 가셨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쇠사슬이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의 한 마디 질문이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향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규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 너머에 있는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 이것이 이 본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건너편으로 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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