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QT

열둘 중의 하나

김익제 2026. 4. 2. 09:27

마가복음 14:10-11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1. 스스로 떠난 발걸음

마가는 유다를 소개할 때 '열둘 중의 하나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함께 먹고 자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보여주신 바로 그 열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까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가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더 일찍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6: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를 택하시고, 곁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주권에 관한 문제이지, 유다의 배반이 불가피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다는 끝까지 선택의 주체였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가매'라는 동사입니다. 누가 유다를 불러낸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이 유다를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유다가 스스로 발걸음을 옮겨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 본문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22:3-5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누가는 '사탄이 들어갔다'는 영적 차원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다의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이 들어간 것은 유다의 마음이 이미 그 방향을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직전 본문(막 14:3-9)에서 한 여인은 예수님께 '가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려 했습니다. 같은 동사,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누구에게로 '가느냐'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2. 가치의 전도

마가복음은 대제사장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전합니다.

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가 먼저 값을 물었습니다. '얼마나 주려느냐.' 이 질문 안에 이미 교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기는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 은 삼십은 구약에서 종 한 명의 가격이었습니다(출 21:32). 유다는 메시아를 종의 값에 팔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다의 내면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는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신뢰를 받았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가 '도둑이라'고 말합니다. 돈궤를 맡으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자란 것인지,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돈이 유다의 마음에서 예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일만 악의 뿌리'라는 표현이 강렬합니다. 돈 자체가 악인 것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문제입니다. 돈이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뀔 때, 보이지 않는 전도(顚倒)가 일어납니다. 유다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보다 은 삼십이 더 가치 있게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이 뒤집어졌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반드시 돈이 아니더라도, 지금 내 마음에서 예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그것이 인정이든, 안정이든, 성취이든, 그것과 예수님을 교환하고 있지는 않은지. 유다의 이야기가 무서운 것은 특별히 악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치가 조용히 뒤바뀐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3. 방향이 정해진 마음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결정이 내려진 후, 유다가 한 일은 '기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넘겨줄 것인지를 계산하고 탐색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이 과정이 순간적 충동이 아니라 지속적 탐색이라는 점입니다. '찾더라'는 계속적 행위를 나타냅니다.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도,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과정을 단계적으로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 → 죄 → 사망. 이 과정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작은 욕심이 자라나고,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서서히 갉아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배반이라는 결정적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죄는 대부분 폭발적이기보다 점진적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이라는 표현은, 마음을 지키는 일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지키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돈궤는 지켰지만(오히려 거기서 훔쳤지만), 마음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몸은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매일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기회를 찾고 있느냐입니다. 섬길 기회를 찾고 있는지, 빠져나갈 기회를 찾고 있는지. 드릴 기회를 찾고 있는지, 취할 기회를 찾고 있는지. 마음의 방향이 정해지면, 기회는 그 방향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유다에게 예수님 곁의 시간은 은혜의 기회가 아니라 배반의 기회로 보였습니다. 같은 자리, 같은 시간이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묵상을 마치며

오늘 본문은 단 두 절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다는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이적을 보았고, 공동체의 살림까지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대제사장들에게로 향했고, 그의 마음은 은 삼십에 값이 매겨졌고, 그의 눈은 넘겨줄 기회만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어제 묵상한 본문에서, 한 여인은 자기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을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마가는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같은 예수님 앞에서 전혀 다른 두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손과 은 삼십을 세는 손 사이에, 우리의 자리가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 내가 찾고 있는 기회의 종류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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