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QT

무리의 소리, 그리스도의 침묵

김익제 2026. 4. 5. 01:53

마가복음 15:6-15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 두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라바입니다.

 

본문은 그를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7절)라고 소개합니다.

 

바라바는 로마 제국에 대한 무장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피를 흘린 자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빌라도 자신이 '유대인의 왕'(9절)이라 부른 분,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넘겨 준 줄 빌라도가 알고 있던(10절) 분이십니다.

 

바라바라는 이름 자체가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바르-아바, bar-abba)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죄수가 풀려나고, 참된 아버지의 아들이신 분이 그 자리에 서십니다.

 

겟세마네에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셨던 바로 그분이, 지금 아무 말씀 없이 서 계십니다.

마가복음 14:36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불과 몇 시간 전,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 이후,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15:5).

 

무리가 바라바를 달라고 외칠 때에도, 빌라도가 '어떻게 하랴'고 물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체념이 아닙니다.

 

겟세마네에서 이미 결단하신 순종의 결과입니다.

 

이사야는 이 장면을 수백 년 전에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라바의 죄만이 아닙니다.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외친 무리의 죄, 무리를 충동한 대제사장들의 죄, 그리고 우리의 죄가 그에게 담당되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지만, 실제로는 죄 있는 온 인류와 죄 없으신 한 분 사이의 자리바꿈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자리바꿈의 의미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바라바가 석방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죄인 된 그 상태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서 주셨습니다.

 

2.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넘기다

10절은 빌라도의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넘겨진 이유가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절에서 빌라도가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1절은 상황을 뒤집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헬라어 '아나세이오'(ἀνασείω)는 '흔들어 일으키다, 선동하다'는 뜻입니다.

 

무리의 요구는 자발적 판단이 아니라 종교 권력에 의해 조종된 것이었습니다.

 

빌라도가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12절)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논증이 아니라 외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3절).

 

빌라도가 이유를 물었을 때, 대답 대신 '더욱 소리 지르되'(14절)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15절의 결정은 이렇게 내려집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헬라어 '히카논 포이에사이'(ἱκανὸν ποιῆσαι)는 '충분하게 해주다, 만족시키다'는 뜻의 라틴 관용구를 번역한 표현입니다.

 

로마 총독이 진리를 알면서도 군중의 만족을 위해 무죄한 사람을 넘겨준 것입니다.

 

빌라도의 판결은 정의의 판결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판결의 이면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죄로 삼으신 것.' 빌라도가 무죄를 알면서도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인간적으로는 비겁한 타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죄 없으신 분이 죄로 여겨지시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불의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십자가형은 로마법에서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었고, 유대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의 표지였습니다(신 21:23). 그리스도께서는 이 이중의 저주를 자발적으로 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넘겨지신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지만, 동시에 겟세마네에서 이미 '아버지의 원대로' 받아들이신 잔이었습니다.

 

3. 채찍질과 십자가를 향해 가신 길

15절은 짧은 한 절 안에 극심한 고통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채찍질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프라겔로사스'(φραγελλώσας)는 로마식 태형인 플라겔룸(flagellum)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매질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플라겔룸은 여러 가닥의 가죽 끈에 날카로운 뼈 조각, 납 구슬, 쇠 조각을 매달아 만든 채찍이었습니다.

 

죄수를 기둥에 묶고 등, 엉덩이, 다리를 내리칠 때, 가죽 끈이 살을 감아 올리면서 끝에 달린 뼈와 납이 피부를 찢고 근육 조직을 드러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이 형벌로 내장이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채찍질만으로 죽는 죄수도 적지 않았기에, 이것은 사실상 십자가형 이전에 가해지는 또 하나의 사형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 장면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히브리어 '하부라'(חֲבוּרָה)는 '채찍 자국, 상처, 멍'을 뜻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채찍 자국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며 증언합니다.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베드로가 '친히'라는 단어를 쓴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 '아우토스'(αὐτός)는 '그 자신이 직접'이라는 강조입니다.

 

대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마지막 단어, '넘겨 주니라'(παρέδωκεν, 파레도켄)는 마가복음 수난 내러티브에서 반복되는 핵심 동사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 주었고(14:10),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고(15:1), 이제 빌라도가 십자가에 '넘겨' 줍니다.

 

인간의 손에서 손으로 넘겨지시는 이 과정 전체가,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대속의 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로 번역된 헬라어 '뤼트론'(λύτρον)은 노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지불하는 값, 몸값을 의미합니다.

 

바라바는 그날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나가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셨습니다.

 

바라바가 경험한 것, 죄인인 자신이 풀려나고 무죄한 분이 자기 대신 형벌을 받는 것, 이것이 대속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라바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묵상을 마치며

빌라도의 법정에서 벌어진 일은 2천 년 전의 사건이지만, 그 구조는 지금도 동일합니다.

 

죄 있는 자가 풀려나고, 죄 없으신 분이 넘겨지셨습니다.

 

바라바가 석방되어 걸어 나올 때, 그는 자기 뒤에서 채찍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채찍이, 자기가 달려야 할 십자가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라바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바라바만이 아니라 우리였다는 것을, 그리고 넘겨지신 그분의 침묵 속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 침묵 앞에 서면, 우리도 침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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