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QT

나는 아니지요

김익제 2026. 4. 3. 03:01

마가복음 14:12-21

본문 배경: 유월절과 무교절

유월절(פֶּסַח, 페사흐)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밤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기 전, 각 가족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넘어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사흐'(פָּסַח)에서 유월절이라는 이름이 유래합니다. 유월절 음식은 불에 구운 어린 양의 고기,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 그리고 쓴 나물로 구성되었습니다(출 12:8). 무교절(חַג הַמַּצּוֹת, 학 함마쪼트)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7일간 이어지는 절기로, 이 기간 동안 집 안에서 누룩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습니다. 누룩 없이 급히 만든 빵은 애굽을 떠나던 밤의 긴박함을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문이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막 14:12)이라고 기록하는 것은, 이 두 절기가 사실상 하나의 큰 명절로 연결되어 지켜졌기 때문입니다. 이 식탁 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1. 어린 양의 피로 얻은 생명

유월절 양이 잡히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디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할지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성내로 보내시며 장소를 지시하셨습니다. 큰 다락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합니다(막 14:12-16). 겉으로 보면 매년 반복되는 유월절의 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식탁에는 출애굽의 밤과는 다른 의미가 놓여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이 넘어가게 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밤, 피가 발려 있는 집은 심판을 넘어갔습니다. 피 자체에 어떤 마법적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양이 이미 죽었다는 것, 곧 누군가가 대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그 표적의 의미였습니다. 바울은 이 유월절 양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고린도전서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같은 언어로 증언했습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월절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명절 음식을 나누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잡히실 어린 양이셨습니다. 베드로는 후날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의 생명은 이 피로 얻은 것입니다. 은이나 금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유월절 식탁 위에 놓인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이 놓여 있었습니다.

 

2. 함께 먹으면서 파는 자

유월절 음식이 준비되고, 저녁이 되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무거운 말씀을 꺼내십니다.

 

마가복음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이 문장의 무게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관계의 표현이자 신뢰의 행위였습니다. 시편 기자도 이 배반의 고통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함께 떡을 먹으면서 동시에 배반을 품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식탁 위의 비극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장면을 더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심령이 괴로워'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 '에타락테'(ἐταράχθη)는 깊은 동요, 내면의 격동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당하실 것을 이미 아셨지만,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걸었던 자가 자신을 넘기려 한다는 사실 앞에서 심령이 괴로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3:26-2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유다는 예수님의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떡을 함께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이 떠나 있었던 시간들이 쌓여 그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의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나 함께 먹으면서도 마음의 우선순위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우리는 유다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파는 것은 반드시 은 삼십에 넘기는 극적인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이 그분을 향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미 넘겨주는 행위의 시작입니다.

 

3.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의 선언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마가복음 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나는 아니지요'(μήτι ἐγώ, 메티 에고). 이 질문의 헬라어 구조는 '아니겠지요?'라는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형태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확신할 수도 없었기에 물어야 했습니다. '근심하며'라는 말이 그 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자신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근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자신은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혹시 자신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열한 명의 제자들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질문을 던졌고, 유다는 알면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차이는 밖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탁 위에서는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20-21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 이것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이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매우 드문, 극히 엄중한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 밖에 있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배반하는 자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아니지요"라는 질문을 진심으로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근심하며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형식적인 안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성찰이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라는 기도는, 자기 스스로는 자기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유다도 처음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게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음이 조금씩 떠나고,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고,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묵상을 마치며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식탁에 주님께서 앉아 계셨고, 우리도 그 식탁에 초대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식탁에서 주님을 판 자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함께 먹으면서, 함께 손을 넣으면서.

 

제자들은 근심하며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이 질문을 오늘 나에게도 묻습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먹으면서 동시에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질문 앞에서 쉽게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묵상은 정죄가 아니라 돌아옴의 자리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여는 자리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분이 지금도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앞에서, 다시 그분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한 가지입니다.

 

어린 양의 피 앞에서, 나는 다시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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