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QT

발치에 앉는 것이 먼저입니다

김익제 2026. 3. 21. 01:37

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 주님을 위한 수고가 주님을 잃게 할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기술하면서 마르다를 집의 주인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일행을 맞아들인 것은 마르다의 주도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 영접 자체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런데 40절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여기서 '마음이 분주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페리에스파토(περιεσπᾶτο)는 '사방으로 끌려다니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이쪽저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았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음식도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자리도 정돈하고, 손님들을 살피는 일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 했습니다. 이 마음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을 위한 수고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마르다의 손은 예수님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르다의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22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드리는 것 자체보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마르다의 수고는 일종의 '제사'와 같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분주한 손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을 듣는 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도 같은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준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순서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먼저이고, 나머지는 그 뒤에 따라옵니다. 마르다의 실수는 수고한 것이 아니라, 수고를 먼저 놓은 것이었습니다.

 

 

2. 마르다야 마르다야

마르다의 분주함은 결국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40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이 말 속에는 마리아를 향한 불만뿐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원망까지 담겨 있습니다.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함을 드러냅니다.

 

분주함이 마음을 지배하면, 섬기던 대상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분주함의 위험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 주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꾸짖음이 아니라 부름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성경에서 깊은 관심과 다급한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창 22:11), 모세를 부르실 때(출 3:4), 사무엘을 부르실 때(삼상 3:10) 하나님은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름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여기서 '염려하다'(μεριμνάω)와 '근심하다'(θορυβάζω)는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전자는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나뉘는 것을, 후자는 내면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마르다의 안은 갈라지고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태를 정확히 보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분주함에 지친 마르다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쉼은 일을 멈추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데서 옵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진리를 노래합니다.

 

시편 46:10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게으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분주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마르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3.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예수님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 말씀은 마르다가 여러 가지를 준비한 것과 대비됩니다. 마르다는 많은 것을 차려놓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한 가지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가지'는 단순히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을 '좋은 편'(τὴν ἀγαθὴν μερίδα)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음식은 먹으면 없어집니다. 준비한 상은 치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 그분의 발치에 앉은 그 시간은 영원히 남습니다.

 

다윗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시편 27:4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이 구한 '한 가지'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이것이 빼앗기지 않는 좋은 편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다른 말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출발점은 행함이 아니라 들음입니다. 마리아가 발치에 앉아 한 것은 바로 이 '들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그 자리가 믿음이 자라는 자리이고, 빼앗기지 않는 좋은 편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묵상을 마치며

마르다의 수고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의 손은 예수님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분주한 준비보다, 발치에 앉아 음성을 듣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르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한 일에 바쁘면서, 정작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면서도 마음은 분주하고, 기도하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두 번 부르고 계십니다. 먼저 발치에 앉으라고, 한 가지면 족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분주한 손을 잠시 멈추고, 먼저 그분의 음성 앞에 앉는 것이 좋은 편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