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31-37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 보고도 지나간 사람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피하여 지나갑니다'(31절).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32절).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모르고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보았고, 피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고, 율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명령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식과 직분이 사랑을 보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왜 지나갔는지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시체에 닿으면 부정해진다는 의식법(민 19:11)을 의식했을 수도 있고, 강도가 근처에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는 같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곁을 보고도 지나간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분은 제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의 절차보다 그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도 같은 맥락에서 전합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의적 완전함이 아니라 인애, 곧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자비였습니다. 율법을 일생 연구한 자들이 율법의 핵심인 사랑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핑곗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여줍니다.
2. 불쌍히 여김이 발을 멈추게 할 때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릅니다(33절). 그도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쓰러진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만이 '불쌍히 여겼습니다'. 같은 장면을 보았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불쌍히 여겨'로 번역된 헬라어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플랑크니스테)는 '창자가 뒤틀리다'라는 뜻에서 온 단어입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몸 전체가 반응하는 깊은 긍휼을 가리킵니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실 때 사용됩니다(마 9:36, 막 1:41, 눅 7:13). 사마리아 사람의 반응은 예수님의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긍휼은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34-35절의 행동은 구체적이고 치밀합니다. '가까이 가서' — 접근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 응급 처치합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 이동과 간호를 합니다.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 비용을 지불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 이후까지 책임집니다.
불쌍히 여김이 발을 멈추게 했고, 멈춘 발이 가까이 다가갔고, 다가간 손이 상처를 싸맸고, 그 돌봄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랑은 감정의 순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간과 비용과 수고를 동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은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이었고, 순간이 아니라 지속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관계였습니다(요 4:9). 쓰러진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 사람은 자기 민족도, 자기 종교 공동체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웃의 경계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앞선 본문에서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하며 경계를 긋고자 했던 것과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요한은 이 원리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요한일서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그에게서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었지만, 이웃 앞을 지나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성전과 무관한 자리에 있었지만, 이웃 앞에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이웃 앞에서의 발걸음입니다.
3. 쉬운 선택이 되도록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뒤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질문의 방향이 바뀌어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웃은 규정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되어가는 관계입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 그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복잡한 율법적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정의, 인자, 겸손한 동행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일생의 율법 연구가 아니라, 찰나의 순종으로 행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그 자체로 존귀합니다. 동시에, 이 사랑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율법에 바친 제사장과 레위인의 지나침이 아니라, 길 위에서 발을 멈춘 사마리아 사람의 찰나를 이웃 됨의 본으로 드셨습니다. 야고보도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명령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단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순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길 위에서 쓰러진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 안에는 제사장의 논리와 사마리아 사람의 긍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바쁘다는 이유,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 부정해질 수 있다는 이유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 순간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매일의 훈련입니다.
묵상을 마치며
제사장은 보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보고 멈추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같은 길 위에 있었고, 같은 장면을 보았습니다. 차이는 하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발을 멈추게 했느냐, 아니면 아는 것이 오히려 발을 돌리게 했느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이고, 이 사랑의 진위는 길 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선택이 쉬워지도록, 나는 오늘도 훈련합니다.
아는 것이 멈추는 것이 되고, 멈추는 것이 가까이 가는 것이 되는 자리, 거기에 이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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