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QT

빈들에 계신 그리스도

김익제 2026. 3. 6. 01:24

누가복음 9:12-17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1. 빈들에 예수님이 계시다

날이 저물어 갑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여쭙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에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눅 9:12). 제자들의 판단은 합리적이었습니다. 해는 지고, 사람은 많고, 먹을 것은 없습니다. '빈 들'이라는 말은 이 상황을 정확하게 요약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된 것이 있습니다. 그 빈 들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장소의 조건을 보았고, 그 조건 안에 계신 분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상황의 부족함을 먼저 보고, 그 한가운데 계신 분을 나중에 떠올리는 일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빈 들', 곧 광야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광야가 등장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 들어섰을 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4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광야는 비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채우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경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78:19
"19.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광야에서 식탁을 차리실 수 있으랴"는 불신의 질문이었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광야에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이사야는 이 원리를 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사야 43:19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신다는 것은 조건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오천 명이 모인 빈 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빈 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2. 주님의 손을 거치면

제자들의 제안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눅 9:13).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오천 명 앞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불가능한 명령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과정을 보여주셨습니다. 16절의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 가지심 → 축사하심 → 떼심 → 주심. 이 네 동작은 단순한 서술이 아닙니다.

 

"가지사"는 제자들의 손에 있던 것이 예수님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부족한 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는 순간이 시작점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놓였음을 보여줍니다. "떼어"는 나눔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어"는, 나누는 역할을 다시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했던 바로 그 제자들의 손을 통해 빵이 나누어졌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은 제자들의 능력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에 있는 것을 주님의 손으로 가져오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열왕기하에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4:42-44
"42.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백 명 앞에 보리떡 이십 개를 놓으라는 명령도 불합리해 보였습니다. 시종의 반응은 제자들의 반응과 거의 같습니다.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그러나 엘리사는 반복합니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근거는 사람의 계산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먹고 남은 것이 여호와의 말씀과 같았더라"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고린도후서 9:8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이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넉넉하심은 부분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을 거치면, 다섯 개의 떡은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것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입니다.

 

3. 열두 바구니가 채울 수 없는 것

17절은 짧지만 의미심장합니다. "먹고 다 배부른 후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았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시작한 것이, 열두 바구니의 남은 조각으로 끝났습니다. 부족에서 시작하여 넘침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열두 바구니는 빈 들의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열두 바구니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열두 바구니를 넘어 열두 트럭을 주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나 혹시 우리의 신앙이, 열두 바구니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고 이에 만족할까 봐, 주님은 바구니에서 멈추신 것은 아닙니까?

 

요한복음은 이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 날, 무리가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날카로웠습니다.

요한복음 6:26-27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무리는 떡을 먹고 배부른 것 때문에 다시 왔습니다. 표적의 의미, 곧 떡을 주신 분 자체가 아니라, 떡 자체를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식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직접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떡을 주신 분이 곧 생명의 떡이십니다. 열두 바구니는 배를 채웠지만, 영혼의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에게 '모든 것'은 열두 바구니에 해당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벌, 혈통, 율법의 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하면 배설물이었습니다. 열두 바구니가 열두 트럭이 되어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우상이 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이 자리에서 울려 퍼집니다.

시편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묵상을 마치며

빈 들에 오천 명이 있었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고, 열두 바구니의 남은 조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리고 그 모든 것 이후에도, 그 자리에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것을 받아 넘치게 하시지만, 그 넘침이 주님 자신을 가리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열두 바구니가 아니라, 열두 바구니를 채우신 그 손입니다.

 

배부름 너머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