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답변

2. 종교 믿는 사람들, 결국 정신승리 아닌가요?

김익제 2026. 4. 6. 01:09

질문을 함께 살펴봅시다.

 

기독교인들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고 하고, 잘 안 풀리면 "연단의 시간이야"라고 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쁜 일이 생겨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밖에서 보면,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거 그냥 정신승리 아닌가요?

 

이 질문에는 오래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19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신이란 인간이 자기 소망을 투영해 만든 것이라고 했고,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종교를 "환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런 뜻입니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니까,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를 붙여서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다.

 

솔직히, 이 비판을 100% 반박할 방법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경험하는 위로와 의미가 자기 투영인지, 아니면 실제인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을 인정한 뒤에도, 질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질문이 시작됩니다.

 

정신승리가 나쁜 것인가?

 

그리고 정신승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 맞습니다, 정신승리입니다.

성경 안에도 허무를 고백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הֶבֶל)'은 '안개', '수증기'라는 뜻입니다.

 

잡으려 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것, 있는 것 같은데 없는 것 — 그것이 헤벨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허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권을 통째로 할애해서 그 허무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정신승리라는 비판을 기독교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고백을 품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을 '정신승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맞습니다.

 

기독교인은 정신승리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정신승리'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나쁜데 좋다고 우기는 것,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덮는 것 — 이런 것이 나쁜 정신승리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나쁘다는 것을 인정한 채로, 그 안에서 방향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고통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고, 항의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2. 의미 부여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인생사 새옹지마"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이것도 1년 뒤에는 추억이 되겠지"

 

 

이런 말들은 종교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들도 정신승리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 '나중에 좋아질 것이다'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니까요.

 

객관적으로 보면, 새옹지마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부여는 종교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의미 없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고, 의미 없이는 기쁨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에 두느냐, '하나님 안에서 이 일에도 뜻이 있다'에 두느냐 — 의미 부여의 행위 자체는 동일합니다.

 

야고보서(신약성경의 한 편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

 

이것은 분명히 정신승리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이유를 말합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고, 인내가 온전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을 감고 "다 괜찮아"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과정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은 '겉사람은 낡아진다'고 인정합니다.

 

현실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정신승리라면, 바울은 매우 의도적으로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는 확신입니다.

 

3. 받아들이되, 순응하지 않는 삶

그러면 기독교의 정신승리는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의미 부여에는 두 가지 방향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족이고, 다른 하나는 저항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서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에서 '배웠다'(ἔμαθον, 에마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자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어떤 상황에서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투옥과 매질과 기아를 겪으면서, 그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훈련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의미 부여의 첫 번째 방향입니다.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그 상황 안에서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의미 부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박국(구약의 예언자)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박국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 양, 소 — 당시 사회에서 이것들이 없다는 것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낱낱이 열거한 뒤에, '그래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뜬 채로, 현실을 다 본 채로, 그럼에도 기쁨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에스더(구약의 인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학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왕에게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당시 법률상 왕의 부름 없이 왕에게 나아가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궁극적 신뢰가 죽음의 두려움까지 초월하게 만든 것입니다.

 

에스더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학살이 예정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동력은 '정신승리' —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 — 에서 왔습니다.

 

기독교가 훈련하는 의미 부여는,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게 하고 현실에 맞서게 하는 힘입니다.

 

받아들이되, 순응하지 않는 것.

 

자족하되,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 '정신승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생각해볼 점

정신승리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서 보면, 의미 부여는 인간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도구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의미 없이 고통을 버텨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의미 부여를 자기 안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 하나님에게서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는, 이 글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만약 의미 부여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다면, 문제는 정신승리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승리를 선택하느냐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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