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답변

1. 세상이 이 모양인데, 하나님이 있다고요?

김익제 2026. 4. 5. 01:27

질문을 함께 살펴봅시다.

 

뉴스를 켜면 전쟁이 있고, 아이들이 굶고, 지진이 도시를 삼킵니다.

 

가까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잘못 없이 병에 걸리는 사람이 있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한순간에 무너지는 삶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신이 정말 있는 건가'라고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전능하고 선한 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고통이 넘칩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가?"

 

이것은 기독교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입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저는 기독교가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며, 그 안에서 어떤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 글은 그 방향을 함께 살펴보려는 시도입니다.

 

답을 드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 앞에서 기독교가 어디를 바라보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1. 철학자도 신학자도 피하지 못한 질문

이 질문에는 오래된 이름이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정리한 논증입니다.

 

그 구조는 이렇습니다.

 

  1. 신이 악을 막을 의지가 있는데 못 막는다면 — 전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2.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이 있는데 안 막는다면 —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3. 신이 악을 막을 의지가 있고 막을 능력도 있다면 — 악이 있으면 안 됩니다.
  4. 그런데 악은 존재합니다.
  5. 그러므로 전능하고 선한 신은 없다 — 이것이 에피쿠로스 논증의 결론입니다.

이 논증은 2,3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 논증을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 동안 다루어 왔습니다.

 

신정론이란,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시라면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학문적 탐구입니다.

 

이 탐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답에 도달한 신학자는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이 질문은 반복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구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왜 버리셨습니까', '왜 돕지 않으십니까'입니다.

 

성경은 이런 질문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외침을 시편 안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고통 앞에서 '왜'라고 묻는 것은, 성경 안에서도 정당한 기도입니다.

 

욥기(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권의 책)는 이 주제를 가장 깊이 다루는 본문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재산, 자녀, 건강 — 어떤 잘못도 없이, 전부 무너졌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성경 본문은 처음부터 그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욥은 38장 동안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침내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아닙니다.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하나님은 욥에게 '왜'에 대한 설명 대신,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시가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관점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선언입니다.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부분에서 쉬운 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이 문제에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사랑이 가능하려면

에피쿠로스 논증에 대해 기독교 신학이 가장 오래, 가장 자주 제시해 온 응답이 있습니다.

 

'자유 의지 논증'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이렇습니다.

 

사랑, 우정, 신뢰, 용기 — 이런 것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선한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이 가치들이 진짜가 되려면, 반드시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강제될 수 없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프로그래밍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이야기가 이 구조를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허락하시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2:16-17).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그 나무를 아예 만들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만드셨습니다.

 

왜일까요?

 

선택의 가능성이 없으면 순종도 사랑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악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만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섬길 수 있는 만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상당 부분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입니다.

 

전쟁, 착취, 거짓말, 폭력 — 이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이 논증으로 모든 고통이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자연재해로 죽는 아이는 누군가의 자유 의지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자마자 병에 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논의가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자유 의지 논증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응답이지, 완전한 해답이 아닙니다.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악을 제거하시려면,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는, 사랑도 없습니다. 바울(기독교 초기의 핵심 인물)은 이 긴장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을 고통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쉽게 건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지금 고통받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울 자신이 이 고백을 한 맥락을 보면, 그는 투옥과 매질과 석형의 위협 속에서 이 말을 했습니다.

 

이 고백은 고통 밖에서 한 관조가 아니라, 고통 안에서 한 신뢰의 선언이었습니다.

 

3. 고통의 한가운데로 오신 하나님

기독교가 고통의 문제에 대해 내놓는 가장 독특한 응답은, 사실 논증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고통의 문제를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고통의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셨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구약성경의 예언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사야 53:3-4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를 아는 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것은 '고통에 친숙한 자', 곧 고통을 경험적으로 아는 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 안에 들어와 직접 겪으신 분입니다.

 

빌립보서는 이 과정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워'라는 헬라어 원어(ἐκένωσεν, 에케노센)는 '완전히 비우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인간이 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인간으로서의 삶이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 — 이것이 기독교가 고통의 문제 앞에서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짧지만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을 위에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 앞에서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전능한 신이 왜 악을 막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기독교의 응답은 그 논증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이 스스로 고통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의문을 해소하지는 않습니다.

 

왜 고통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여전히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바라보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를 방관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 자기 자신이 고통당하시는 방식으로 — 그 문제 안에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 글이 '세상에 왜 고통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깔끔한 답을 드리지 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2,000년 동안 연구해 온 사람들도 이 질문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답을 찾는' 질문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는 신이 없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이 없어도 고통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그 고통에 아무런 의미도, 방향도, 위로도 없게 됩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고통 안에서의 동행입니다.

 

그 동행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입니다.

 

고통 앞에서 '왜'라고 묻는 것은, 어쩌면 이미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